센터이야기

[안산마을만들기 이슈브리프 Vol.5] 우리 사이엔 이야기가 있다(송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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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chedule 2026-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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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어떻게 자라날까.
한 사람이 성장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리고 마을의 작은 공간은 아이들의 성장에 무엇을 보탤 수 있을까.

청소년열정공간99도씨(이하 99도씨)는 안산 사동 마을 작은 골목에 자리한 청소년 공간이다. 아이들은 이곳을 편하게 ‘99’라고 부른다. 친구와 함께 와서 쉬고 놀기도 하고, 밥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동아리 활동을 하고, 하고 싶은 일을 궁리하고,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99도씨는 꼭 무언가를 배우거나 이루어야 하는 곳은 아니다. 특별한 목적이 없어도 청소년이면 누구나 편하게 들어와 자기다운 모습으로 머물 수 있는 곳이 99다.

 

99도씨는 마을 청소년들이 스스로 요구하고 찾으며 어른들과 함께 만든 공간이다. 2015년 마을 원탁회의에 참여한 청소년들이 마을에 경로당처럼 청소년들이 자유롭게 어울려 놀 수 있는 청소년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는 목소리로 시작된 곳이다. 2012년부터 마을에서 청소년 동아리를 이끌던 김부일 선생님이 청소년 공간을 만들기 위해 아이들과 부단히 애를 쓴 끝에 안산에 처음으로 시민들의 후원으로 운영되는 마을 청소년 공간이 만들어지게 됐다. 당시 아이들은 마을 축제에서 장터도 열고, 영화제에서 과자도 팔며 운영기금을 모았고, 99도씨 벽화도 같이 그리고 청소도 하면서 ‘청소년이 주인인 99’ 공간을 함께 만들었다.

그래서였을까. 어느덧 10년이 지나 20대 나이가 된 청년들은 여전히 99도씨 공간을 편안하게 들린다. 종종 안부를 들려주며 이야기를 나누다 갈 때도 있고, 시간을 내서 동생들과 보드게임을 하거나 요리를 함께 만들어 먹기도 한다. 군대나 직장생활 등으로 한참을 못 보다가 오랜만에 만나도 이상하게 어제 만난 것처럼 반갑고 정겹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궁금해진다. 청년들에게 99도씨는 어떤 곳으로 남아 있을까. 이곳에서 함께 보낸 시간은 아이들의 삶에 무엇으로 남아 있을까.

 

5년 전 99도씨에서 청소년 시기를 보낸 아이들이 남긴 글들을 찬찬히 살펴본다. 여러 번 등장하는 말들이 눈에 띈다. ‘언제 와도 편안한 곳’, ‘자기다운 모습으로 자유롭게 지낼 수 있는 곳’, ‘생각을 나눌 수 있는 곳’, ‘나를 발견할 수 있는 곳’, ‘타인과 소통하는 법을 배운 곳’. ‘사람 관계를 풀어가는 방법, 다른 사람을 위로하는 법을 알게 되었고, 공동체가 삶을 얼마나 풍요롭게 할 수 있는지 느꼈다’는 이야기도 볼 수 있다.

99도씨에서 아이들은 서로 다른 개성을 가진 친구들과 만난다. 처음에는 낯설었던 친구의 말과 행동이 조금씩 익숙해지고, 나와 다른 생각을 가 진 사람과도 한 공간에서 지내는 법을 배운다. 때로는 다투고 서운할 때 도 있지만, 다시 말을 걸고 함께 밥을 먹으며 관계를 풀어가기도 한다. 함께 살아가는 법은 책상에서만 배울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나와 다른 타인을 만나고, 때로는 불편함을 겪고, 그럼에도 다시 관계를 이어 가는 경험 속에서 서서히 익혀가는 삶의 기술이다. 아이들은 99도씨에서 함께 놀고, 요리하고, 밥을 먹으며 수다를 떨며 일상을 공유한다. 어쩌면 성장은 그런 평범한 순간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 주는 일, 내 생각을 말해 보는 일,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 보는 일. 함께 무언가를 하다가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다시 방법을 찾아보는 일. 그런 경험이 쌓이면서 아이들은 자신과 타인을 조금씩 알아간다. 다름을 존중하고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는 방법을 배운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일이 좋아졌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데 거리낌이 없어졌다’는 청소년들의 이야기는 그 시간을 지나온 흔적처럼 느껴진다.

 

99도씨에서 아이들은 다양한 경험 속에서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도 알아가며, 세상과 연결된다. ‘벽화 작업을 주도하며 자신감을 얻었고 하고 싶은 일이 생겼다’는 청소년, ‘봉사활동을 하고 어른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어느새 사람들 만나는 일이 좋아졌다’는 아이들. 글을 읽고 토론하며 생각을 행동으로 옮겨보는 다양한 활동을 통해 ‘내가 사는 세상과 사회에 관심을 갖게 되고, 세상을 보는 가치관이 생겼다’는 청소년들의 소감도 인상 깊다. 또, 말하지 못했던 속마음과 생각을 언어와 몸짓으로 표현해보는 예술교육 활동을 통해서 청소년들은 자신을 발견해 나가면서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동력을 얻기도 했다.

 

청소년 공간을 지키며 알게 된 것, 성장은 믿음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다. 지금 당장 달라지는 모습이 보이지 않아도 아이들이 자신만의 시간을 지나며 자라나고 있다고 믿는 일. 어른의 기준으로 현재의 모습을 쉽게 판단하지 않고, 아직 드러나지 않는 가능성을 기다리는 일. 아이들은 저마다 다른 계절을 살아가고, 저마다의 때에 결국, 자신만의 이야기를 피워낸다.

아이들의 성장을 지켜보는 일보다 더 멋진 풍경은 없다. 처음에는 낯을 가리던 아이가 어느새 자기 생각을 이야기하고, 타인을 향해 날카로운 가시를 세우던 아이가 누군가를 먼저 배려하고 챙기는 모습을 보게 된다. 청소년기를 함께 보낸 청년이 다시 찾아와 동생들에게 자기가 가진 것을 나누고 돌보는 순간을 바라본다. 그 변화는 한순간의 특별한 사건 때문이라기보다는, 여러 사람과 함께 보낸 시간 속에서 조금씩 자라난 것인지도 모른다.

누군가가 알아봐주고, 작은 시도를 응원해주고, 잘되지 않더라도 다시 해 볼 수 있는 시간이 쌓이면서 자연스럽게 꽃을 피웠을지도 모른다.

지난 2024년 4월에는 99도씨의 시작이자 어쩌면 전부였을지도 모를 김부일 선생님께서 세상을 떠나셨다. 청소년들을 몹시 사랑했던 99도씨의 든든한 어른이 떠난 뒤, 남은 사람들에게는 이 공간을 계속 지켜 나갈 수 있을지 묻는 시간이 찾아왔다. 감당하기 힘든 슬픔을 뒤로하고 다시 99도씨의 불을 켰고, 아이들이 찾아왔다. 어제처럼 변함없이 청소년들과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며 뭔가를 함께 만들어내는 하루하루를 보냈다. 돌이켜보면 사랑하는 사람을 기억할 수 있는 공간에서 일상을 꾸리고, 돌봐야 할 아이들이 있었기에 그 시간을 잘 버텨왔는지도 모른다. 가까운 곳에 마음을 나눌 사람들이 있다는 것, 내 마음이 쓰이는 공동체가 있다는 것은 다시 잘살아 보고 싶은 마음을 만들어 준다.

 

청소년이면 누구나 편하게 들어와 머물 수 있는 곳, 특별한 이유가 없어도 찾아올 수 있는 곳. 99도씨는 어쩌면 집이 아니라 정류장 같은 곳일 지도 모른다. 구름 같고 날씨 같은 청소년들은 언젠가는 각자의 길을 찾아 날아갈 거다. 다만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과 함께했던 시간, 자신이 존중받았던 경험, 내 이야기를 표현하고 누군가에게 귀 기울였던 기억이 희미하게라도 삶의 한 부분으로 남았으면 좋겠다. 훗날 다른 곳에서 누군가를 만났을 때 자신이 받았던 환대를 건네고, 타인의 이야기를 조금 더 깊이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 이곳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세상에 관심을 갖고 작은 연대를 나누던 경험이 흩어져 버리는 기억 조각에 머물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기억들이 아이들 삶 어딘가에 작은 뿌리로 남아, 새로운 곳에서도 자기 삶을 단단하게 살아갈 힘이 되었으면 좋겠다.

끝내 살아남은 삶에 뿌리내린 작은 ‘이야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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