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강사: 최도연 선생님 (원곡고 역사교사)
<기억에 남는 내용>
12강 마지막 수업은 특별했어요~ 다문화사회에 근접한 안산을 공부하면서 다문화인들에 대한 이해와 차별을 멈추자는 의미로 팔찌를 만들었거든요...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면서 이해하는 역사 수업도 좋았지만 수동적으로 듣기만 하다가 직접 ‘차별 STOP’ 팔찌를 만드는 활동은 아이들도 참여할 수 있고 즐겁고 인상적인 마무리가 되었답니다. ^^ 강의 준비도 철저하신데다가 팔찌 재료까지 준비하여 즐거움까지 주신 최도연 선생님 고맙습니다!!!
<주요내용>
1. 안산의 변화
일제시대에서 해방될 무렵 안산은 시골 농어촌마을이었다. 당시 인구 2만이 안 되는 작은 곳이었는데, 계획도시로 발전함과 동시에 다양한 이주민들이 들어오면서 큰 변화가 시작된다.
피양촌은 1937년 일제에 의해 부설된 수인선에 의해 군자염전, 소래염전에서 생산된 소금을 운반하면서 군자면 지역에 형성되었다. 염전기술자들의 마을로 주로 평안도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구성되었으며 평양촌이라는 이름에서 변형된 것으로 보인다.
사리포구는 동부, 별망포구는 서부라는 이름으로 지칭하였으며 주로 용암포와 신의주 출신의 사람들이 자리잡았다.
화랑농원은 부천시에 살던 상이용사들이 안산으로 이주해와 정착하면서 만들어진 이름이며 화랑유원지도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고향마을은 안산시 사동에 위치하며, 1990년대 시작된 정부의 사할린 동포 영주이주사업으로 2000년 2월 이후 귀국한 사할린 동포 1세대를 위해 조성된 영구 임대 아파트 단지이다. 부지를 안산시에서 제공하고 건축비는 일본 적십자사에서 제공하였다.
2. 사할린 동포의 역사
‘사할린’은 러시아 와 일본 사이에 있는 섬이다. 러일전쟁 이후 섬의 북쪽은 러시아가, 남쪽은 일본이 관할한다. 그러다 러시아 내전 기간 동안 일본이 사할린 전역을 관리하다가 1922년 소련이 탄생하던 시점에 다시 북쪽은 소련이 남쪽은 일본이 관할한다. 그리고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우리 민족은 일제에 의하여 사할린으로 강제 징용으로 끌려가 탄광 및 군수공장에서 혹사당하다가 종전을 맞이하였다.
일본 패망 이후 남사할린에는 일본인 30만명, 조선인 4만3천명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일본은 소련이 사할린을 점령하기 전에 조선인을 배제하고 일본인 7만6천명만 홋카이도로 이주시킨다. 그리고 1946년 12월 미국과 소련의 협정으로 일본인 29만명은 본토로 귀환한다. 1956년 일소공동선언으로 일본인 처와 그 동반자인 조선인 인부나 아이들 2천여명이 귀환한다. 그런데 귀환 대상자는 일반 일본인이었으며 조선 호적을 가진 자는 제외되며 그들은 무국적자가 된다. 소련은 자국의 노동력 확보를 위해 조선인 귀환에 소극적이었으며 북한은 사할린 조선인을 재외국민으로 칭한다. 사할린에 남겨진 우리 민족은 주로 남한 출신이었는데 대내외적인 상황에 따라 방치되어진다. 1994년 한일정상회담에서 사할린 한인문제에 대한 포괄적 해결방안을 마련하게 되며 1991년부터 2013년까지 총 4,116명의 사할린 한인들이 영주 귀국하게 된다. 이들은 경북 고령 대창 양로원, 인천 사할린 복지관, 안산 고향마을 및 전국에 산재한 임대아파트에 거주하게 되었다. 이로써 모든 것이 해결된 것은 아니다. 한인 1세대만 영주 귀국이 가능했기 때문에 가족 동행은 불가하였다. 2017년 5월 8일 자로 474가구에 596명이 살고 있다.
3. 고려인의 역사
국내 거주하는 고려인은 약 4만 명이 넘으며 안산에 거주하는 고려인은 현재 약 1만 명이 넘는다. 고려인은 소련 붕괴 이후 독립 국가 연합 전체에 거주하는 한민족을 이르는 말이다. 이들은 19세기 말 극동 러시아에 거주하던 고려인에 기원한다. 1864년 함경도 지방의 조선인들이 두만강을 건너 러시아령 남우스리스크 지역에 영구 거주를 목적으로 촌락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한인동포들의 해외 이주 기원이 되었다. 1900년대의 러시아는 조선이 독립운동을 하기 위한 피난처가 되었고 시베리아는 일본에 대항하기 위한 독립군 양성의 터전이기도 했다. 1937년 스탈린은 17만명의 고려인들을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고려인이 일본인의 첩자가 될 수 있다는 명목이었다. 고려인 지도자 2,500여명이 체포, 투옥되었고 이주 도중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다. 스탈린 사후 고려인들은 뛰어난 농업생산기술가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구소련이 붕괴되면서 카자흐스탄 등의 나라가 독립하면서 각 국의 모국어를 사용하고 이슬람 민족주의가 일어나면서 고려인들은 언어적 문제와 더불어 삶의 기반을 잃게 된다. 2007년 중국과 독립국가연합 재외동포들을 대상으로 방문취업제가 실시되자 방문취업(H2) 비자를 받아 입국하는 고려인이 급증했다. 고려인 동포는 국내에서 어떤 법적 지위도 지원도 전무한 외국인노동자일뿐이다.
현재 우리나라는 전체 인구의 3.9%가 외국인으로 다문화사회로 근접하고 있다. 그들은 주로 기초산업의 인력을 채우고 있으며, 농촌지역의 결혼 이주, 중국이나 고려인 동포로 입국하는 인원이 증가하고 있다. 특히 우리 안산은 공단과 거주 밀집지역이 발전하면서 지속적으로 외국인이 증가하고 있으며 국내 출생하는 학생수도 늘어나고 있다. 안산원곡초등학교는 90%이상이 다문화학생이다. 이러한 특성을 차별이나 불편한 시각으로 바라볼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사는 마음으로 다문화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고 지속적인 교류의 기회를 넓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