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강사: 강관섭 선생님(안산디자인문화고 역사교사)
<새롭게 알게 된 내용이나 가장 기억에 남는 내용>
-강세황 선생의 일대기: 진주 강씨 집안의 이야기, 늦었다고 생각할 때 늦지 않았던 삶
<주요내용>
1. 강세황의 성장배경과 가족관계
강세황은 전형적인 명문 집안 진주 강씨이다. 강세황을 포함하여 아버지, 할아버지까지 3대가 기로소(국립 양로원)에 들어가는 영광을 누렸다. 아버지 강현은 예조판서라는 높은 관직에 있었으나 아들 강세륜의 역모죄에 영향을 받아 낙인이 찍혀 강세황마저 벼슬길에 나가기 어려웠다. 강세륜의 역모는 역적 중 한 사람과 이름이 비슷했다는 오해였음이 밝혀지지만 조정에서 활동하기가 쉽지 않았다. 강세황은 진주유씨와 혼인하여 살다가 경제적 어려움으로 안산 처가에서 살게 된다. 슬하에 강인, 강완, 강관, 강빈 4아들과 나주나씨 소생의 강신을 두었다.
2. 강세황의 예술세계와 인적 교류
강세황은 출사의 길이 막힌 대신 학문과 예술에 침잠하여 젊은 시절을 보냈다. 안산 처가에 머물렀던 30년은 그의 예술세계가 완성되었던 시기로 평가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송도기행첩(1757), 우금암도(1771), 풍악장유첩(1788) 등을 남겼으며, 초상화 8점 중 4점은 자화상이다.
강세황은 처남 유경종, 이수봉, 문인화가 허필, 심사정, 최북 외에 성호 이익과도 교류하였다. 그 중 현재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은 풍속화의 거장 단원 김홍도이며, 그는 김홍도를 천부적으로 타고난 화가로 평가하였으며 사제관계를 넘어 자신의 친구로 정의하였다.
3. 강세황의 출사: 늦었다고 생각했지만 늦지 않았다.
강세황의 둘째 아들 강완이 과거에 급제하면서 조정활동의 기회가 생긴다. 61세의 강세황은 영조의 선임으로 사포서의 별제직을 수행하며 64세에 과거에 합격한다. 정조대에도 병조참의, 호조참판, 도총관 등을 역임하였으며 71세가 되던 1783년에 기로소에 들어가게 된다.
가는 매우 늦은 출사였지만 젊은 시절 축적해 놓은 예술적 역량을 조정에서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고 나이가 많은 것이 문제가 되기 보다는 오히려 기회가 되었다.